노벨 물리학상을 통해 본 일본 과학 발전의 역사성


김명호 작가 제공

먼저 제 소개를 간단하게 할게요. 저는 일본의 학부와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후, 한국에 돌아와서 엔지니어 생활을 얼마간 했습니다. 이후에는 과학기술 관련 통번역사로 활동하기도 했고요. 아무튼 부끄럽게 느껴지는 석사학위지만, 연구 주제는 참 재미있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반물질의 최소 단위인 반수소 원자를 합성하는 실험이었어요.
그러려고 하는 과학이 아니다
짧게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왜 우주는 반물질이 아닌 물질로 가득찼는가 하는 물음과 관련된 중요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제가 참여했을 때는 뒤의 실험을 위해 그 재료인 반수소를 준비하는 단계까지 갔고요. 당시 경쟁하던 세 팀 중 가장 늦게 합성에 성공했지만, 다른 두 팀과는 다른 독자적인 방식으로 접근했기에 의미 있는 결과였습니다. 아주 짧은 경험이지만, 잠시나마 과학 연구 현장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싶었습니다.
엊그제 어떤 분이 메신저로 물어보시더라고요. “과학자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잠시 고민하다 이렇게 답했습니다. “길어질 것 같으니 밥 사주시면 말씀해 드릴게요.” 짧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결국 과학은 무엇인지 그리고 왜 하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질 듯 한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벨상을 타려고 하는 건 아니다.’
마침 일본의 노벨상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상황이었고, 계속 그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에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여름 지나면 가을이고, 곧 10월 노벨상 수상자 발표 시즌입니다. 아마 이번 해에도 여느 때처럼 일본의 노벨상에 대한 분석기사가 나오지 않을까 하네요. 그때는 아래 이야기를 한번 떠올려봐 주시고요. 이웃나라의 상패를 마냥 부러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이어가 봅니다.
20세기 초 격변기와 유럽의 젊은 과학자들
노벨 물리학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혹시 수상자 중 떠오르는 사람이 있으신지요? 아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웬만큼 이상 과학에 관심이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금방 이름을 대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다소의 편향을 감안하고 세 명만 들어보겠습니다. 아인슈타인, 보어, 하이젠베르크입니다. 모두 현대물리학의 기반을 다진 것으로 유명한 물리학자들이지요.
이 셋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20대 중후반에 진행한 연구를 인정받았다는 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하이젠베르크는 서른 둘에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위에서는 빠졌지만 스물 다섯의 나이로 최연소 기록을 세운 브래그도 있지요. 아버지와 아들 브래그가 공동수상했는데, 물론 아들 쪽 이야깁니다. 고체물리학 분야에서 지대한 공헌을 했지요.
부러워하지 말라더니 좌절하게 만든다고 항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냉철히 생각해봅시다. 물론 전체 수상자를 봐도 그 수가 적기는 합니다만, 21세기 들어서 젊은 과학자가 이삼십대에 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20세기가 역사적으로 정말 예외적인 시기여서, 선천적인 천재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태어난 것일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고전역학의 패러다임이 무너진 20세기 초는 물리학의 격변기였으며, 특히 1920~1930년대 비약적으로 발전한 양자역학이 유럽 학계를 뒤흔들었습니다. 한창 청년이었던 물리학도들은 하루 하루 새로운 도전적 과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 시대를 만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 자신 그 시대의 산물이기도 했습니다. 시간 스케일은 훨씬 크지만, 마치 제자백가 사상가들이 춘추전국 시대를 살았던 것처럼요.
격변기를 지나 ‘따라잡기'에 성공한 일본
20세기 초가 물리학의 격변기였다는 표현을 썼는데요. 그에 앞선 반세기를 반추해보면 과장된 수사가 아님이 선명히 드러납니다. 1860년대 맥스웰이 논의한 기체분자운동론이 볼츠만에 의해 정립된 19세기 말까지도 원자와 분자의 실재는 학계에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기가 바뀐 뒤 불과 10여 년 만에 원자는 물리학자들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보어의 원자 모형이 제시된 게 1913년입니다. 견고한 철학의 방벽으로 볼츠만의 원자론을 막아섰던 마흐가 아직 살아있을 때입니다.
오사카제국대학 초대 총장 나가오카 한타로는 독일 유학생 시절부터 이 광경을 생생히 지켜봤을 것입니다. 1890년대 볼츠만 문하에서 배운 경험도 있었던 그는 이화학연구소(RIKEN)의 아버지라 불리는 니시나 요시오와 함께 일본 내 후진 양성을 위해 전력을 다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임했을까요? 유럽이 과학의 본류이며 일본은 변방의 아류처럼 여겨지는 상황을, 새로운 학문의 시류를 기회 삼아 어떻게든 극복하려 굳게 마음 먹었던 것 같습니다.
오사카대학 이학계연구과 대강의실에는 아직도 그가 즐겨쓰던 말인 물상조박(勿嘗糟粕)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조박(술을 거르고 남은 찌꺼기)을 핥지 말라는 뜻으로, 무언가를 만든 사람의 정신을 이해하지 않은 채 겉모습만 따라하지 말라는 이야기라 합니다. 유럽의 동향에 줄곧 민감하게 반응하며 '본류'의 인정을 받기 위해 분투했던 일본 학자의 마음을 옅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나가오카는 원자 내에 반대의 전하를 띈 요소가 내외로 분리되어 있는 토성모형(1903)을 러더포드 원자 모형(1911)에 앞서 제시한 공로을 인정받아 노벨상 수상 후보 추천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는데요. 노벨 재단이 공개한 문건에 따르면 그는 1914년 ‘일본의 과학은 요람기에 있으며 일본인을 추천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나가오카는 1940년이 되어서야, 1935년 중간자 이론을 제창한 유카와 히데키를 첫 일본인 수상 후보로 추천했습니다. 유카와는 194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두 세대에 걸친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일본의 초기 과학 특히 이론물리학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1920~1930년대 유럽에서의 패러다임 격변기에 거의 실시간으로 가장 논쟁적인 주제에 뛰어들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물리학 박사 1호가 배출된 시기는 1950년대 후반으로, 이미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틀이 갖춰지고 한참 지난 후였습니다.) 물론 그 이전 한 세대 이상 열정적으로 일본 내 학풍을 꾸리려 노력한 기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겠지만, 고전역학이 만약 그때까지 '현대물리학'으로 군림했다면 물리학에서 일본의 '화려한 데뷔'는 없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이 제도와 문화보다 큰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0세기 전반은 그렇다 하자, 그러나 일본은 그 이후에도 반세기 이상 꾸준히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리학상의 경우에 한해 한번 살펴봅시다. 2008년도 수상자 코바야시・마스카와를 제외하면 전부 실험물리학 분야의 수상자들인데, 예외인 둘은 1973년 제창한 이론이 수십년 후에 검증되어 공로를 인정받은 경우입니다. 같은 해 수상한 난부 요이치로는 1970년대에 귀화한 미국인으로, 수상의 이유였던 자발적 대칭성 깨짐은 1960년대 연구 주제였습니다.
즉, 전후 장족의 경제발전을 이룬 1970년대 이후로는 거대 규모의 실험(빅사이언스)에 대한 지원이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역시 학문의 흐름을 읽고 민첩하고 과감하게 역량을 집중한 결과였습니다. 반대로, 이론물리학 분야에서 20세기 초의 경우처럼 혜성 같은 젊은 연구자가 나타나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세계적인 추세를 볼 때 그렇습니다.
무엇을 위한 노벨상인가
서두에서 이웃나라의 상패를 마냥 부러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많은 분석기사가 쏟아져 나오지요. 왜 일본은 그렇게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수 있었는가 하고요. 물론 개중에는 ‘상을 타기 위한' 힌트가 될 만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제 역사에 비추어 보면 공허한 외침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그 상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유카와의 수상 소식은 전후 무너져 있던 일본 국민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는데요. 그 중요한 배경 중 하나는 일정 분야에서 유럽과 대등한 문명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이 아니었을지요. 과학자에게도 일반 국민에게도 노벨상은 일종의 '문명국 인증서’로 기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메이지 유신부터 시작된 탈아입구의 맥락도 기저에 있었겠고요. 그게 좋아보인다는 건 아닙니다만, 묻고 싶어집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일본과 같은 맥락에서 노벨상을 원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노벨상이 화제가 될 때,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 동기가 제게는 불분명해 보입니다.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 서양으로부터 과학을 받아들인 입장에서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외재적 동기가 클 수밖에 없는 면도 있지요. 다만 일본의 경우에는 좀 더 근원적인 측면에 대한 결핍감이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상패를 통한 표면적인 인정을 넘어서서, 서구의 학문 수준과 실질적으로 동격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반세기가 지난 지금, 강렬한 결핍이 해소됨으로써 호기심이 거할 자리가 늘어난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미숙한 대학원생으로서 잠시 힘을 보탰던 프로젝트는 만약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할 경우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다분한 분야였어요. 그러나 같이 연구하시는 분들 중 누구도 거기에 천착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갈 길이 너무 먼 탓도 있을 수 있고, 막상 목표 달성이 가시권에 들어오면 동요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봤습니다. 그러나 연구를 진행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는 역시 물질과 반물질의 대칭성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성립하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탐구심’이었던 것 같네요.

지나치게 나이브하고 이상적인 이야기일지요? 어쩌면 위에서 말한 연구의 목표는 많은 사람에게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에 비해 연구분야를 떠나 누군가 한국인 최초로 자연과학 분야의 노벨상을 받는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게 되겠지요. 물론 합당한 분께서 수상하신다면 기꺼이 축하하고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상징물을 얻는 것 보다는, 과학을 하는 내재적 동기에 대한 고민이 한국 사회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좋은 참고서는 역사인 것 같아요.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웃나라가 성공한 핵심 요인을 더듬어 찾기 전에, 먼저 그들의 사료에 빛을 비추어 보는 것은 어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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