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로움에 신령한 아름다움으로 화답하는 민족의 영산 태백산. [사진 하만윤]
국립공원 승격 1년 태백산 무박 종주
‘산 오르는 이유’ 느끼게 한 함백산 능선
태백산은 지난 8월 22일로 도립공원에서 국립공원으로 승격된 지 꼭 1년이 됐다.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 스물두 번째 국립공원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태백산 국립공원화를 놓고 오랫동안 근처 지역 내에서 의견이 분분했으나, 희귀식물 보전 등 체계적인 관리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선 환영할 만한 일이지 싶다.
내려갈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고은 '그 꽃'. [사진하만윤]
이번 산행은 백두대간 두문동재에서 시작해 함백산을 넘어 태백산 천제단을 지나 당골광장으로 내려오는 25km에 달하는 종주 코스다. 초보자에게는 물론, 산을 좀 다닌다는 이들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다.
서울에서 출발해 여유 있게 산행하려면 1박 2일 일정으로 새벽에 들머리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서 서울에서 밤 11시에 출발했다.
대절한 버스는 밤새 지치지 않고 달려 새벽 3시가 못돼 백두대간 두문동재에 당도했다. 미리 확인한 기상 예보는 최저 기온 13도였으나 해발 1268m 높이에서 바람까지 더하니 여름 새벽인가 싶을 정도로 체감온도는 훨씬 더 떨어졌다. 이럴 때는 답이 없다. 출발을 서둘러 몸을 덥히는 수밖에.
여명조차 없는 산길을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이동하기는 무리다.열 명 안팎으로 조를 짜고 이동하는 게 낫다. [사진 산처럼]
앞사람의 움직임과 한줄기 불빛에 의지해 조심조심 발을 내딛어야 한다. 다행히 산길이 험하지 않고 길이 잘 보여 렌턴 불빛만으로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대봉에 도착했다. 빠뜨릴 수 없는 인증사진을 찍고 난 후 다들 렌턴을 끄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잠시 빛을 버렸더니 두 눈에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눈 돌리는 데마다 불빛 가득한 도심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광경이리라.
잠시의 행복을 뒤로 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여기서부터 중함백을 지나 해발고도 1572.1m의 함백산에서 5시 50분에 있을 일출을 만끽하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함백산에서 마주한 여명.해가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 더 아름다운 법이다. [사진 하만윤]
올해 1월 1일 불암산 일출 산행 때도, 6월 북한산 백운대 일출산행 때도 누리지 못한 행운이었다. 이번 산행은 일출을 보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우연히 마주하니 즐거움과 여운이 배가 됐다. 자연은 그렇게 욕심을 버리고 비울 때 비로소 채워준다는 진리를 다시금 곱씹게 됐다.
태백산 신으로 모셔진 단종
함백산에서 얻은 뜻밖의 행운,일출. [사진 하만윤]
사길령은 보부상들이 다니던 옛고갯길로 강원도와 경상도를 잇는다. 이십 분쯤 오르니 오른쪽에 산령각이 보였다. 산령각은 조선시대 단종이 비운의 운명을 다한 후 태백산으로 들어왔다고 믿은 민초들이 태백산 신으로 받들어 모신 곳이다.
땀도 식힐 겸 산령각에서 잠시 쉬며 내부에 안치돼 있는 탱화를 한동안 바라본다. 백마를 탄 어린 임금을 그린 탱화는 왠지 슬프고도 애잔하게 느껴졌다.
단종을 태백산신으로 받들어 모신 산령각.사길령을 오른 후 잠시 숨을 고르고 땀을 식히기에 안성맞춤인 터가 있다. [사진 하만윤]
천제단 이정표.여기부터 한동안 오르막길이다. [사진 하만윤]
한겨울에도 가지마다 흰 눈을 쌓고 꼿꼿이 서있는 것도 잊히지 않는 자태나, 짙푸른 여름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모습은 한동안 가슴에 남을 것이다.
청명한 여름 하늘 아래 제각각의 모습으로 서있는 주목나무. [사진 하만윤]
천왕단은 하늘에, 장군단은 사람에, 하단은 땅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해마다 하늘이 열린 개천절에 천왕제를 지낸다고 하니 내심 없던 욕심이 생겼다. 올해 개천절에 다시 와볼 수 있을까.
태백산 천제단의 천왕단.개천절마다 천제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다. [사진산처럼]
올 1월에 이곳을 찾았을 때 시간에 쫓겨 가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은 터였다. 반재로 내려가는 길과 비교하면 오르막을 다시 올라야 하지만, 문수봉에서 천제단을 바라보고 그 뒤로 유려하게 이어진 함백산 능선을 마주한다면 누구라도 무릎을 칠 것이라 자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명한 하늘 아래 펼친 산 능선은 그야말로 그림이었다. ‘그래, 이런 거지.’ 나도 모르게 조용히 읊조리게 됐다. 산을 오르는 건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고, 이처럼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산을 오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라고.
문수봉에서 마주한 천제단. 한 폭의 풍경화가 따로 없다. [사진 하만윤]
물소리를 따라 걸은 지 40분쯤 지나자 계곡이 비로소 속살을 보여줬다. 마치 폭포마냥 작은 돌무더기 사이로 물줄기가 세차게 흘러나왔다.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시 배낭을 내리고 슬며시 발을 담갔다.
새벽부터 13시간 동안 24km를 걸어온 발에게 이만한 힐링이 또 있을까. 계곡물은 한여름이라도 역시 차가웠다. 오래 담글 수 없어 금세 발을 뺐다. 잠시나마 물로 열기를 식힌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걸으며 보고 듣고 느꼈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종국에는 좋은 기억, 아름다운 풍경만 남았다.
함백산 두문동재를 들머리로 은대봉-중함백-함백산-만항재-화방재-사길령-유일사-장군봉-문수봉-당골광장으로 하산. 총 24.4Km, 소요시간 13시간. [사진 하만윤]
긴 산행에 지칠 대로 지친 탓인지, 버스에 오르자마자 몸을 구기다시피 의자에 던졌다. 시나브로 눈이 감겼다. 올 겨울에 주목나무 서리꽃을, 그 시린 칼바람을, 눈이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만나러 태백산에 다시 올 수 있기를. 희미해지는 의식의 끝자락에 희망 한줄기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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