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앗아간 다발성경화증

그녀를 앗아간 다발성경화증

‘재클린 두 프레’의 이름을 전공의 때 처음 들었습니다. ‘다발성경화증(multiple sclerosis)’에 대한 신경병리학 강의 동영상을 보는데, 교수님께서 그녀의 삶과 음악 이야기를 해주셨지요. 무겁고 어두운 강단 한 가운데, 첼로를 켜며 환하게 웃던 그녀의 사진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그녀의 삶을 그린 영화가 있다고 해서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신동으로 나타나, 음악의 요정이 되었고, 세기의 커플이 된 다음 비극적인 말년과 쓸쓸한 죽음으로 점철된 삶입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비극의 모든 요소를 골고루 다 갖추었습니다. 그러니 영화 <힐러리아 재키>도 흥미로울 수 밖에 없겠지요.

영국, 두 소녀가 자매로 자랍니다. 자매는 너무나도 친해서 둘은 마치 한 몸인 듯,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정도네요. 세 살 위인 언니 힐러리는 플룻을, 동생 재키는 첼로를 배웁니다. 재키는 언제나 언니를 따라 잡으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처음에는 힐러리가 재능을 보이는듯 했지만 곧 재키의 천재성이 드러납니다. 이후로 언니는 동생의 그늘에 가려버립니다.

재키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첼로의 신동 소리를 듣고, 데뷔 무대에서도 크게 성공하여 영국을 대표하는 연주자로 우뚝 섭니다. 반면에 힐러리는 음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결혼 후 연주자의 길을 포기합니다.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하여 전세계를 다니며 연주를 하던 재키, 하지만 외로움에 지쳤을까요? 아니면 언니의 결혼을 시샘했을까요? 재키는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과 깜짝 결혼합니다. 촉망받는 두 젊은 음악가의 결합은 그들의 연주 활동을 더욱 왕성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어느 날, 연주 일정도 취소해버리고 남편으로부터 달아난 재키는 언니의 시골집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언니에게 아주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을 합니다.

재클린 두 프레, 20세기를 대표하는 여류 첼리스트입니다. 그녀의 이야기에는 늘상 세 가지 열쇳말이 따라다닙니다. 엘가의 첼로협주곡, 다발성경화증, 그리고 남편 다니엘 바렘보임입니다. 엘가의 첼로협주곡은 그녀의 연주가 유일무이한 레퍼런스가 되었고, 다발성경화증은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병석에 누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날아가버린 무정한 바람동이로 낙인이 찍힙니다.

영화는 음악 애호가들도 잘 몰랐던 그녀의 사생활을 소상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일부 내용은 충격적이기도 하고, 관련자들이 아직 생존해 있으며,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끌린 뒤 프레’라고 읽는(덕분에 프랑스인으로 오해하는) 재클린 두 프레는 어려서부터 첼로를 너무나도 좋아했고, 16세에 공식 데뷔, 17세에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처음 연주해서 20세에 이 전설적인 음반을 녹음합니다. 이때가 1965년입니다. 이미 떠오르는 샛별, 첼로계의 신동으로 빛나는 이름을 얻습니다.

그 시절, 런던은 고전음악의 중심지였습니다. 전세계에서 온 젊은 음악가들이 런던에서 활동을 했는데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마르타 아르헤리치, 다니엘 바렌보임 같은 차세대의 거장 피아니스트들로 있었지요. 재키는 우연히 만난 다니엘(대니) 바렌보임과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결혼까지는 난관이 많았습니다. 대니는 아르헨티나 국적의 유대인이었기에 그와 결혼하려면 기독교를 버리고 유대교로 개종을 해야했습니다.  언론들도 야심가인 대니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 ‘위풍당당한 영국 장미와 왜소한 이스라엘 선인장의 만남’으로 묘사했습니다.

1967년 6월에 팔레스타인에서 전쟁이 터지자 대니와 재키는 이스라엘로 달려갑니다. 총 대신 지휘봉과 첼로를 든 이 유명한 커플은 전선을 순회하며 음악으로 이스라엘 장병들을 위문합니다. 6일 만에 이스라엘이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6일 전쟁>으로 부릅니다), 재키는 아예 현지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다음 결혼식도 치룹니다. 재키 나이 불과 22세였습니다.

두 프레와 바렌보임. ⓒ Free Photo

이후로 이 커플은 공동 음악활동을 합니다. 대니의 친구들과 함께 실내악곡들을 연주하고, 대니는 아내의 전매특허가 된 엘가의 첼로협주곡의 협연 지휘자로 동반하여 일급 지휘자의 반열에 오릅니다(바렌보임의 친구들인 펄만, 주커만, 메타와 함께 연주한 슈베르트 현안5중주 <송어>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ZdXoER96is).

하지만 너무나도 빨리 핀 이 영국 장미가 벌써 시들 기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21세), 물체가 두 개로 보이고(24세), 손가락 감각이 이상하고, 다리가 풀려 걸음도 힘겨워집니다(25세). 처음에는 워낙 빽빽한 연주 일정 때문에 힘들어서 그런 것으로 여겼지만 휴식과 안정으로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이 무렵에 언니 집을 찾아갔을까요?

더 이상 음반 녹음은 안 했지만(1973년부터는 녹음 중단), 그래도 중요한 연주 일정은 소화해야 했기에 억지로 무대에 오릅니다. 하지만 연주 도중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아 연주를 멈추는 일까지 생깁니다(설상가상으로 엘가의 첼로협주곡은 독주자가 거의 쉴 틈이 없습니다). 1973년 연초에 ‘사고’가 터지자 연주 일정이 취소됩니다. 그녀의 몸에 생긴 이상은 이제 기자들의 기사로 보도되기 시작했고, 해가 바뀌기 전에 영국의 신경과 전문의가 그녀에게 다발성경화증(multiple sclerosis)라는 희귀병을 진단합니다. 불과 28세였습니다.

다발성경화증의 병소 스케치. ⓒ 위키백과

신경섬유를 둘러싸는 ‘수초’라 불리는 피막이 녹아버려 신경 기능이 망가지는 다발성경화증은 불치병입니다. 대니는 아내의 곁을 지키며 이런저런 용한 치료법을 다 써보았지만 보람이 없었습니다. 점점 나빠졌지요. 그러다가 1975년에 대니가 신생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직 제안을 받고 해협 건너로 활동 무대를 옮기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별거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대니는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키로바마와 동거에 들어가 아이까지 낳습니다.

투병 14년 만인 1987년, 재키는 세상을 떠납니다. 남편은 그녀를 버렸지만 재키는 유대교를 버리지 않아 유대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유대식 이름으로, 런던에 있는 유대인의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충격적인 내용은 즉, 대니에게서 달아난 재키가 언니 집에 저질렀다고 주장되는 끔찍한 일은 그녀의 팬들에겐 큰 충격을 줍니다. 과연 사실일까요?

영화는 재키의 언니인 힐러리와 남동생인 피어스(Piers and Hilary du Pre)가 함께 쓴 <A Genius in the Family>의 내용에 기반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사건의 당사자가 공개한 것이라 더 충격입니다. 물론 영화와 책이 공개되자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나 로이드 웨버(Julian Lloyd Webber)같은 첼리스트들은 허위 사실에 공분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언론사로 보냈습니다. 그녀와 가까웠던 멘후인, 펄먼, 주커먼 등의 음악가들도 왜곡된(?) 영화에 반대했습니다.

대니는 아예 영화화를 반대했으며(개봉 후에도 프랑스에서는 상영도 안되었습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는가?”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영화에 대해 유감을 전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친구들의 증언이지만, 바렌보임은 긍정도 부정도 안합니다. 재키와 살과 피를 나눈 언니와 동생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무엇이 팩트인지 체크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라 제3자인 우리들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중추신경계 구석구석을 망가뜨리는 다발성경화증은 너무나도 다양한 증상을 일으킵니다. 시력을 망가뜨리는 것부터, 팔다리를 못쓰게 만들고, 대소변을 못 가리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적 능력과 정신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환자들은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자살 위험이 높아지지요), 이성적인 판단을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제멋대로 행동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재키의 돌연한 행동은 병증으로 본다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의학적인 관점으로 그녀의 불행한 병증들이 정확히 밝혀지고 해석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한참을 기다려야 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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