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긴 개체들이 먹이가 부족한 시기에 1인치나 2인치라도 더 높은 나뭇잎에 닿을 수 있었기 때문에 종종 살아남았을 것이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에서
기린의 목은 진화론의 개념을 설명하는 고전적인 예다. 획득형질(용불용설)에 따른 진화를 주장한 장-밥티스트 라마르크는 원래 기린의 목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따먹으려고 목을 늘리다보니 세대가 지남에 따라 조금씩 길어져 결국은 지금의 기린이 됐다고 설명했다.
반면 두 세대 뒤에 태어난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론을 주장했는데, 이에 따르면 이미 목 길이가 조금씩 다른 기린 개체들이 있었고 먹이가 부족한 시기 목이 더 긴 기린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컸으며, 따라서 그런 형질을 지닌 개체가 다수가 됐다고 설명한다. 즉 임의로 일어난 변이 가운데 환경에 더 적합한 게 선택됐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목이 극단적으로 긴 기린으로 진화했다.
이처럼 기린 목의 진화 과정은 교과서에 나오는, 즉 생물학자들 사이에 이미 합의를 본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다윈의 나라인 영국에서 발행하는 저명한 학술지 ‘네이처’ 9월 14일자는 기린 목의 진화 원인을 먹이부족이 아니라 기후변화에서 설명하는 논문을 소개하는 사설이 실렸다. 즉 날이 덥고 건조해지면서 숲이 사바나로 바뀌면서 낮에 강한 햇빛을 피하기가 어려워진 기린이 체온을 조절하는 생존전략으로 목과 다리를 극단적으로 길게 진화시켰다는 것이다.
기린은 2m가 넘는 긴 목 덕분에 다른 발굽동물들은 엄두도 못내는 4.5m 높이에 달린 나뭇잎도 따먹을 수 있다. 기린이 긴 목이 진화한 원인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데, 최근 고온건조한 기후에서 직사광선을 최대한 피해 효율적으로 체온조절을 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나왔다. ⓒ 위키피디아
태양 쪽으로 목을 기울여
사설에 따르면 사실 이런 가설은 오래 전에 나왔다. 구체적으로는 부피 대 표면적 비로 설명한다. 즉 기린은 비슷한 덩치의 다른 동물에 비해 목과 다리가 길어 표면적이 넓고 따라서 열을 좀 더 효율적으로 내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이를 실험적으로 증명한 연구는 없었다.
이는 몸무게가 비슷한 다른 동물과 별 차이가 없는 값이다. 즉 목과 다리 때문에 표면적이 늘어났지만 몸통의 표면적이 얼마 안 돼(다른 동물들은 기린에 비해 앞뒤로 길쭉하다) 상쇄된다는 것. 그렇다면 기린의 목과 다리가 긴 게 체온조절 때문이라는 가설은 폐기되는 걸까.
연구팀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즉 목과 다리는 길뿐 아니라 가늘어서 주위의 공기흐름이 원활해져 열을 효율적으로 발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린은 해가 쨍쨍한데 이를 피할 그늘이 없을 경우 ‘해바라기’를 해 직사광선에 노출되는 피부 면적을 최소화하는 행동을 보인다. 즉 목을 태양 방향으로 하면 긴 목 대부분이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다. 막대기를 햇빛 방향으로 하면 막대기 끝(기린 머리에 해당)만 직사광선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다. 즉 이유는 바뀌었지만 기린의 목과 다리가 길어진 게 고온건조한 기후변화에 적응한 결과가 맞다는 결론이다. 이 연구결과를 담은 논문은 학술지 ‘건조환경저널(Journal of Arid Environments)’ 10월호에 실렸다.
1949년 영국 언론인 채프먼 핀처는 기린의 목이 길어진 건 긴 앞다리에도 물을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고 주장했다. 그러나 700만 년 전 기린의 조상 사모테리움 메이저(가운데)의 화석을 보면 앞다리는 이미 길어졌음에도 목 길이는 기린(오른쪽)의 절반인 1m였다. 왼쪽은 기린과 가장 가까운 현생 동물인 오카피로 목 길이는 60cm에 불과하다. ⓒ Nikos Solounias
한편 ‘네이처’ 사설에는 체온조절 가설과 함께, 기린 목이 길어진 원인에 대한 다윈의 설명에 처음 도전한 다른 가설도 소개하고 있다. 즉 영국의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채프먼 핀처(Chapman Pincher)는 1949년 ‘네이처’에 기고한 짧은 논문에서 기린이 목이 길어진 건 높이 있는 나뭇잎이 아니라 물을 먹기 위해서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핀처는 다윈의 설명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나뭇잎이 없을 정도로 가혹한 시기가 반복되면 목이 긴 기린이 선택되기도 전에 새끼들이 살아남지 못해 멸종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시기에 왜 다른 발굽동물들은 목이 길어지는 쪽으로 진화하지 않았나. 끝으로 기린은 수컷이 암컷보다 키가 더 큰데 그렇다면 암컷이 솎아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핀처는 기린의 진화에서 중요한 건 다리, 특히 앞다리가 길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리가 워낙 길어 발걸음 재지 않아도 시속 50km로 달릴 수 있어 사자 같은 맹수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다리가 긴 기린이 목은 짧다면 웅덩이의 물을 마시는 ‘자세’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목도 같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즉 목이 길어진 건 다리가 길어진 것에 따르는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말이다. 핀처는 논문 말미에서 저명한 생물학자 줄리언 헉슬리의 자문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기린의 조상 화석이 발견되면서 핀처의 가설은 빛을 잃었다. 즉 700만 년 전 살았던 사모테리움 메이저(Samotherium major)를 보면 몸과 다리는 기린과 거의 비슷하면서도 목의 길이는 1m로 오늘날 기린의 절반 수준이다. 사실 이 화석은 1888년 처음 발견됐지만 독일의 한 박물관 수장고에 묻혀 있다가 1970년대 재발견돼 기린의 조상임이 확인됐다. 그 뒤 다양한 화석 연구결과 기린의 목은 약 100만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길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58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기린의 목이 길어진 원인에 대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다윈 진화론의 약점이 아니라 열린 지식의 장점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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