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을 높게 건축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고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이같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 도시의 마천루를 실현시켜 준 것은 다름 아닌 기중기다.
기중기는 도르레와 끈 혹은 철사를 구조에 설치한 기계로, 무거운 짐을 수평이나 수직으로 움직이게 한다. 기중기는 BC 550년경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보다 몇 백 년 전에 지어진 그리스 건축 구조물에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인간들만의 힘으로 들어 올릴 수 없는 물건을 기중기로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 사회가 점차 발전했고 도시가 형성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플루타르코스의 <마르켈루스의 생애>에서 ‘아르키메데스는 알맞은 양의 힘을 가하면 어떤 중량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고 했는데, 당시 아르키메데스의 갈고리발톱은 침략 선박으로 높이 들어 올린 후 내던져서 부숴버리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기중기를 사용해서 건축물을 만든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 브뤼겔의 <바벨탑>다.
건물 하단에 인부들이 돌을 나르고 있고 탑 꼭대기까지 오르는 계단 중간에 붉은색 막사가 몇 개 설치돼 있다. 나선형 건물 중간 경사로에 거대한 기중기가 설치돼 있다. 기중기 앞쪽 원통에 남자 세 명이 서 있다.
발로 밟아 돌을 올리는 기중기는 당시 안트웨르펜 시장에서 팔고 있었는데, 이런 기중기로 몇 톤이나 되는 돌덩어리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붉은색 막사는 커다란 건축물을 짓는 현장이라는 것을 나타내는데, 당시 건축 현장에서는 인부들이 쉴 수 있게 임시 막사를 설치하고 있었다.
화면 오른쪽 하단 머리에 왕관과 푸른색 도포를 입은 왕이 무사와 사냥꾼들을 이끌고 건설 현장을 방문하고 있고, 돌을 깨고 있던 석공들은 양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 왕관과 푸른색 도포를 입은 남자는 나므릇 왕이라는 것을 나타내며, 건설 중인 거대한 건축물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벨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따르면 지상에 사는 사람들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서로 말이 통했던 그들은 도시를 세우기로 한다. 공동체의식이 강했던 그들은 ‘도시에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아서 우리의 이름을 널리 알리자’라며 탑을 세우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벽돌로 탑을 쌓는 것을 본 하나님은 그들의 자만심을 벌하기로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들을 서로 떨어뜨려 놓은 다음 말이 통하지 않게 하셨는데, 말이 통하지 않자 사람들은 탑을 완성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사람들이 서로 통하지 않게 말을 뒤섞어 놓았다고 해서 도시를 ‘혼돈’을 뜻하는 바벨이라고 불렀으며, 미완성인 탑은 바벨탑이라고 불렀다.
나므릇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석공들의 인사 방식은 유럽의 관습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백성은 군주 앞에서 한쪽 무릎만 꿇었다. 양쪽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석공의 자세는 그림의 배경이 동방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브뤼겔은 성서에 등장하는 바벨탑을 16세기 안트웨르펜의 현실로 바꾸어 묘사하고 있는데, 당시 안트웨르펜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가는 바닷길이 열리면서 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브뤼겔은 안트웨르펜의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시날 들판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 바벨 강변을 택했다. 당시 네덜란드인들은 해상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했는데, 돌처럼 규모가 큰 물품을 수송할 때는 비포장 국도가 아니라 수로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바벨탑 뒤, 강줄기를 따라 존재하는 많은 집들은 도시의 발달을 나타낸다.
브뤼겔은 안트웨르펜의 사회상을 <바벨탑>으로 표현했고, 가톨릭교회를 비판하기 위해 <작은 바벨탑>을 그린다.
<작은 바벨탑> 작품에서 탑 아래에는 도시가 펼쳐져 있고, 강에는 정박 중인 배들이 보인다. 탑 위 버팀목과 기중기들은 건설 중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탑 중간에 걸쳐 있는 구름은 탑의 높이를 나타낸다. 구름 위로 솟은 건물은 바벨탑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피터르 브뤼겔<1525경~1569>의 <바벨탑>과 달리 <작은 바벨탑>은 그가 안트웨르펜에서 활동할 당시 상인이자 금융인이었던 니콜라스 용얼링크의 의뢰로 제작되었다. 바벨탑을 묘사하고 있는 두 작품들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다. 성서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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