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기적 과학 성과, ‘X선 발견’
저명한 과학사학자 쿤(Kuhn)은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X선의 발견을 패러다임의 전환 수준으로 평가한 바 있다. X선의 발견이 과연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이나, 뉴턴의 고전역학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의 변화처럼, 사람들의 사고방식까지 뒤바꿔놓은 패러다임 전환에 해당하는가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튼 뢴트겐의 X선 발견이 물리학 사상 그만큼 중요하고 획기적인 업적이라는 데에는 토를 달기 어려울 것이다.
뢴트겐은 1845년 독일에서 직물업자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848년에 가족에 네덜란드로 이사하였고, 사립학교를 거쳐 위트레흐트 기술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서 불미스런 일에 휘말려 퇴학을 당하여 대학 입학 자격을 박탈당했다. 대신 취리히 연방 기술전문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였고, 나중에 취리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부인을 실험실로 불러서 음극선관에서 나오는 미지의 빛으로 부인의 손 사진을 찍어보았는데, 손 안에 있는 뼈와 함께 손가락의 반지가 선명하게 나타난 사진이 찍히는 것을 보고 더욱 놀라게 되었다. 뢴트겐 부인의 이 손뼈 사진이 바로 인류 최초의 X선 사진인 것이다. 뢴트겐은 이 새로운 광선에 미지의 존재를 의미하는 ‘X선’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를 계기로 유럽의 과학자들은 음극선관 및 X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뢴트겐의 행운을 결코 단순한 우연의 산물로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X선 발견의 단서가 되었던 음극선관 주변의 발광현상, 즉 음극선관 주변에서 사진 건판이 흐려지는 현상은 뢴트겐에 앞서 다른 과학자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룩스관이라는 음극선관을 발명한 크룩스(William Crookes; 1832-1919)도 진작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사진 건판이 못쓰게 되었다고 불평만 했을 뿐,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레나르트(Philip Eduard Anton Lenard; 1862-1947) 역시 음극선관을 이용한 실험을 많이 하면서 음극선관 주변의 발광 현상을 자주 접하였는데, 그는 뢴트겐이 음극선관 실험 장치를 제작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준 과학자였다. 그러나 레나르트 역시 음극선을 금속에 통과시켜 나타나는 현상 등 음극선의 성질 자체의 연구에만 주력하였기 때문에, X선 발견의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비록 레나르트 역시 음극선의 연구로 1905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X선 발견과 같은 획기적인 업적을 뢴트겐에게 양보(?)하게 된 것을 무척 아쉽게 여겼다고 한다.
방사선을 발견한 베크렐은 퀴리부부와 공동으로 1903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고, 전자의 존재를 입증한 톰슨 역시 1906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X선의 발견이 원자핵 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이후에는 원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된 결정에 X선을 쬐여서 구조를 알아내는 X선 결정학이라는 새로운 과학 분야가 생겨나게 되었고, 이는 분자생물학의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X선 덕분에 예전에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인체 내부의 사진까지도 찍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의학의 발전에도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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