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으로서의 과학자

스승으로서의 과학자

며칠 전인 지난 5월 15일은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고 존경을 표하는‘스승의 날’이었다. 5월 15일은 한글 창제 등 숱한 업적을 남긴 겨레의 스승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정해진 것이다.

과거이건 현재건 과학자들도 상당수가 대학교수 등 ‘스승’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역사적으로 스승으로서 과학자들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듯하다.

저명한 과학자의 스승으로서 먼저 떠올릴만한 인물로는, 19세기 최고의 실험물리학자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를 꼽을 수 있다.

패러데이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과학자 험프리 데이비. ⓒ Free Photo

제자가 워낙 유명해지다 보니 그는 자신의 과학적 성과보다는 마이클 패러데이를 발견하여 과학계로 이끈 것이 최고의 업적이라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험프리 데이비 역시 영국왕립학회 회장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서 탄광용 안전등의 발명, 웃음가스인 아산화질소의 연구 및 전기분해 관련 연구 등 나름 여러 업적을 남겼다.

다만 데이비는 제자가 자신을 능가했다는 사실에 대해 질투심을 이기지 못했고, 나중에는 패러데이가 왕립학회 회원이 되는 데에 끝까지 반대하는 등, 그다지 좋은 스승이 되어주지는 못한 것이 과오로 남아있다.

독일의 과학자 리비히( Justus, Freiherr von Liebig; 1803-1873)는 유기화학의 창시자라 불리며, 화학비료를 처음으로 발명한 화학자로 꼽힌다.

그는 암염 중의 염화칼륨 성분을 추출해서 칼륨비료로 사용했고, 동물을 뼈를 갈아 만든 골분에 황산을 섞어 제조한 과인산석회를 인산비료로 써서 메마른 땅에서 농작물을 수확함으로써 농민들을 놀라게 하였다. 생물체의 생장은 필요로 하는 성분 중 최소량으로 공급되는 양분에 의존한다는 ‘리비히의 최소량의 법칙은 중고등학교의 과학교과서에도 잘 나와 있다.

유기화학의 창시자이며 유능한 제자들을 다수 길러낸 리비히. ⓒ Free Photo

그러나 리비히는 자신의 과학적 업적 못지않게 실험실을 잘 운영하고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냄으로써, 과학 연구의 제도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후 21세의 젊은 나이에 독일 기센대학의 교수가 된 그는, 실험 위주의 교육방식을 적용하여 실험실을 학생들에게 개방하고 그들이 제대로 연구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였다. 리비히는 물론 강의와 연구도 잘 하였지만 학생들을 일일이 간섭하기 보다는, 실험지도 및 세미나 등을 통하여 학생들이 최신의 연구 성과를 접하고 스스로 올바른 연구방향을 잡도록 도왔다.

당연히 그의 실험실을 크게 번창하여 수많은 학생들로 붐볐고, 이후 화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뛰어난 제자들을 다수 배출하였다. 콜타르에서 아닐린과 벤젠을 대량으로 제조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여 인공염료의 탄생에 기여한 호프만(August W. Hofmann; 1818-1892), 벤젠의 고리구조를 명확히 밝힌 케쿨레(Friedrich August Kekulé; 1829- 1896) 등이 대표적이며, 그밖에도 국내외에서 수백명 이상의 화학자들이 그의 실험실을 거쳐 감으로서 리비히의 실험실은 전문적인 화학자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명성을 날렸다.

금막에 알파입자를 충돌시키는 산란 실험을 통하여 원자핵의 존재를 처음으로 발견한 영국의 과학자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 -1937)와 그의 스승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 역시 훌륭한 제자들을 여럿 배출한 뛰어난 스승 과학자로 꼽힐 만하다.

뉴질랜드 출생인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유학하여 전자를 발견한 톰슨의 지도 아래 물리학을 연구하였고,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등을 지내면서 유능한 제자들을 여럿 길러냈다. 중성자를 발견한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이 바로 러더퍼드의 제자로서, 그와 공동으로 연구를 한 적이 있다.

모즐리의 법칙 발견으로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꼽혔으나 제1차세계대전에서 전사한 헨리 모즐리. ⓒ Free photo

X선 산란에 관한 연구로 원자번호와 원자핵의 전하량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모즐리의 법칙’을 발견하여 노벨상 수상이 거의 확실시되었던 모즐리(Henry Moseley; 1873-1915) 역시 러더퍼드의 제자였다.

그러나 모즐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 통신병으로 참전하여, 연합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1915년의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 결국 27세의 아까운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참전을 간곡히 만류했던 러더퍼드는 영국의회에 편지를 보내서, 아까운 과학 인재들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보다는 대학이나 연구소 등지에서 과학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나라에 더욱 큰 보탬이 된다는 것을 호소하였다.

이를 영국의회가 받아들였고 다른 여러 나라들에도 퍼졌는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되고 있는 이공계 대체복무제도의 기원이라고 한다.

또한 톰슨과 러더퍼드가 연구소장을 지냈던 캐번디시연구소는 원자물리학 연구의 세계적인 중심지로 자리를 잡아, 자신들을 포함하여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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