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녀와 여의사의 불편한 진실

수녀와 여의사의 불편한 진실

아뉴스 데이(Agnus Dei)란 라틴어로 ‘신의 어린 양(羊)’이란 뜻입니다. 원래 어린 양은, 그리스-로마 시대에 희생제물(犧牲祭物)로 많이 쓴 동물입니다. 아무 죄가 없는 양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 신에게 비쳐지면 인간은 면죄를 받는다는, 아주 편리한(?)  개념이 있었나 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해 희생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예술가들은 ‘아뉴스 데이’를 주제로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양이 주인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입니다. 모두 기독교적인 색채가 있습니다. 오늘의 영화 <아뉴스 데이>도 그런 배경을 이해한다면 감상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전쟁 중 수녀와 여의사가 감당해야 했던 불편한 진실을 담은 영화입니다.

추르바란, <하느님의 어린 양>, 프라도 미술관 ⓒ 위키백과

1946년 12월 폴란드, 프랑스 적십자 야전병원에서 일하는 여의사 마틸드 앞에 폴란드인 수녀가 나타나 도움을 청합니다. 마틸드는 종전 후 이 땅에 남겨진 프랑스군 장병들을 치료하고 본국에 송환시키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기에, 폴란드 적십자로 가보라며 수녀를 매몰차게 내보냅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눈 속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수녀를 보고는 마음이 움직여 그녀를 따라 수녀원으로 갑니다. 수녀원에는 탈진 상태인 산모가 있었고, 마틸드는 바로 제왕절개수술을 해서 아이와 산모의 목숨을 건집니다.

전쟁 기간 동안 독일군과 소련군이 번갈아 가며 수녀원을 짓밟았습니다. 거의 모든 수녀들이 점령군의 성폭력 피해자가 되었고, 일부는 임신까지 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수녀들의 배는 점점 불러옵니다. 하지만 이 기가 막힌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하는 수 없이 수녀원에서 애를 낳으려고 해보았지만 태아가 거꾸로 선 바람에 두 목숨이 위태로워집니다. 그래서 프랑스 여의사가 불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시작입니다. 만삭인 수녀들이 여섯 명이나 더 있으니까요.

고통, 의학, 자비, 종교 같은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었지만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의사가 주인공이라 의학적인 내용도 풍성하지만 마틸드의 재치를 기리는 뜻으로  ‘발진티푸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마틸드가 수녀원에 있을 때 소련군이 들이닥칩니다. 이미 여러 번 치욕을 당했던 수녀들은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 때, 마틸드는 소련군 우두머리에게 가서 이곳에 발진티푸스가 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소련군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며 줄행랑을 놓습니다. 발진티푸스가 어떤 병인 줄 안다면 이 아름다운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발진티푸스(epidemic typhus, typhus fever), 생소한 병이지요? 하지만 오래된 영화나 소설에는 종종 ‘티푸스’라고 불리며 등장하는 병입니다. 우리도 익숙한 ‘장티푸스’와는 완전히 다른 병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에볼라’만큼이나 무서운 병으로 보면 됩니다.

리케챠. ⓒ 위키백과

미생물인 리케챠(rickettsia)가 일으키는 감염병, 엄청난 고통, 높은 치사율, 강한 전염력이 이 병의 열쇳말입니다. 2주의 잠복기를 거치면 두통, 몸살, 오한과 고열로 증상이 나옵니다. 독감과 비슷하지요? 하지만 곧 환자의 온 몸에 작은 종기 같은 발진(發疹)이 돋고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면 발진+티푸스(그리스어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가 함께 온 것 즉, 발진티푸스에 걸린 것입니다. 이 단계가 지나면 종기들로 온 몸이 썩어 들어가며 환자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환자의 20%는 목숨을 잃습니다.

병을 일으키는 리케챠(Rickettsia prowazekii)는 세균과 닮은 점이 많으면서도 바이러스만큼이나 작은 미생물입니다. 환경 속에서는 살 수 없어 주로 이(爾)의 몸 속에 사는데, 배설물을 통해 이의 몸 밖으로 나옵니다.

이란 것이 우리 몸에 딱 붙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피를 빨고 배설물을 흘리고 다니는 존재인데, 물린 자리가 가려워 피부를 긁다가 작은 상처가 생기면 그 갈라진 틈을 통해 리케챠는 인간이 몸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신세계를 만납니다.

증상이 나오기 전에는 알 방법도 없고, 증상이 나오면 치료법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환자 한 사람이 나타나면 주변의 사람들 대부분도 같은 상황이란 말이 되고, 곧 떼죽음이 임박했다는 신호탄이 됩니다. 옮기 전에 어서 달아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발진티푸스는 오래된 병입니다. 15세기에 유럽에 처음 등장해서, 전쟁과 난민, 기아, 포로, 불결 속에서 창궐했습니다. 사람들이 건강할 때에는 이가 별 힘을 못 쓰다가 사람들이 못 먹고, 힘없고, 씻지도 못하고, 앓아 누워있을 때에 이는 세력을 불려 사람을 마구 공격합니다. 이때 리케챠도 덩달아 신이 나는 거지요.

특히 유럽에서는 걸핏하면 터지는 전쟁으로 병력의 대규모 장거리 이동을 타고 발진티푸스도 함께 세를 불렸습니다. 전투를 위해 이동하고 노숙하는 군인들의 지저분한 몰골과 막사, 전쟁 때문에 삶터에서 쫓겨나 굶주리고 허약해진 난민들, 그들을 에워싼 불결, 그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쥐, 그 쥐에 올라탄 이, 이 속에 든 리케챠. 이것이 발진티푸스 창궐의 공식이지요.

16세기에 프랑스가 다빈치가 살던 이탈리아를 침공하다가 포기한 것도, 19세기에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발길을 되돌린 것도 모두 발진티푸스 덕분이었습니다. 이후로도 발칸반도에서, 크리미아반도에서도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군대를 공격하는 대량살상무기로 맹위를 떨쳤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동부전선(독일-러시아 전선)에서 창궐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았던 곳이 바로 폴란드였습니다. 1915~1922년에 동부 폴란드에서는 무려 3,000만 명이 발진티푸스에 걸려(우리나라 수도권 인구가 2,500만 명입니다) 그 중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동유럽의 난민수용소, 포로수용소, 감옥 등 사람들이 밀집되고 불결했던 곳은 어디든 발진티푸스로 수백 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제아무리 야만적인 소련군이라 해도 ‘발진티푸스’소리를 듣고는 줄행랑을 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녀의 재치가 놀라울 수 밖에요!

다행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강력한 살충제인 DDT(수용소에서 하얀 분말이나 연기로 소독하는 데 썼던 살충제)가 나와 리케챠를 옮기는 ‘이’를 없앱니다. 아울러 리케챠에 잘 듣는 클로람페니콜과 테트라싸이클린 같은 항생제가 등장하면서 발진티푸스는 불치병이란 오명을 벗어납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로는 환자가 없지만 현재 제3군전염병으로 지정은 되어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DDT 살포 시범. ⓒ 위키백과

이렇게 기지를 발휘해 소련군을 물리친 마틸드 볼리외(Madeleine Jeanne Marie Pauliac; 1912~1946),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했고, 전후에는 바르샤바에서 프랑스 적십자 야전병원의 군의(軍醫)로 일했습니다. 그때 남긴 일기장이 70년 후에 조카의 손으로 발견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아뉴스 데이>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1945년 12월이었고, 우리의 마틸드는 이듬 해 2월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재미있게 보기 위한 팁 하나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체호프의 총’이라는 법칙을 아십니까? 1막에 총이 등장했다면, 끝나기 전에 발사되어야 한다는 연극의 법칙입니다. 영화의 초반에 수녀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고아(孤兒)들입니다. 전쟁의 또 다른 희생양들이지요. 이 녀석들의 동선을 한번 눈 여겨 보세요. 처음에는 거리에서, 다음에는… 이 동선도 이 영화에서 하나의 복선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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