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도 있고, 있어도 없는 현상은?
그런데 최근 들어 병원을 옮기고 나서부터 그런 소화불량 증상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병원에서 지어준 치료제 덕분이었다. 병명도 ‘단순 소화불량’에서 ‘기능성 소화불량’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권 씨는 이제야 제대로 된 병원을 찾았다는 생각에 식사 시간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권 씨의 아내는 남편의 증상이 걱정이 되어 상담 차 병원을 찾았다가 의사로부터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남편에게 지어준 약이 그냥 단순한 소화제라는 것이다. 의사는 “기능성 소화불량의 원인과 증상은 워낙 다양한데, 남편 분은 정신적 영향이 강한 편”이라고 설명하며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로 인해 좋아지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플라시보 효과
‘placebo’는 ‘기쁘게 해 준다’나 ‘마음에 들도록 한다’라는 뜻의 라틴어로서, 플라시보 효과는 일명 ‘위약(僞藥) 효과’로 불린다. ‘실제로는 없는데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함으로써 나타나는 실제 효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같은 효과가 처음 발견된 시기는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상병은 급증하는데도 치료약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자, 의사들은 가짜 약’을 처방해주면서 치료제라고 부상병들을 속였다.
그런데 의외의 현상이 나타났다. 상식적으로는 전혀 효과가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짜 약을 먹은 부상병들의 상태가 눈에 띄게 호전됐던 것이다.
이 같은 현상에 흥미를 느낀 의료진들은 곧바로 임상실험에 착수했고, 그 결과 호전의 원인이 바로 ‘심리적 자기암시’라는 점을 파악했다. 치료약을 먹었으니 좋아질 것이라는 환자 스스로의 심리적 치료효과였던 것.
하지만 가짜 약이 사람의 심리상태에 따라 효과를 낸다는 이론이 과연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이다. 플라시보 효과가 오로지 심리적 현상일 뿐이라는 설명과는 달리 만성적 통증을 감소시키는데도 실제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임상 사례들이 하나둘씩 발표되고 있다.
연구진은 우선 건강한 젊은 남성 15명의 팔에 열을 가해 통증을 느끼는 부위를 측정한 뒤에 2개의 연고를 발랐다. 연구진은 연고를 발라주면서 실험 대상자들에게 2개 중 하나는 ‘강력한 효과가 있는 진통제’이며, 다른 하나는 ‘피부 보호제’라고 말했다.
임상 테스트가 끝나고 실험 대상자들에게 증상의 정도를 묻자 ‘진통제’라고 말한 연고를 바른 대상자들이 ‘보호 보호제’라고 말한 연고를 바른 대상자들보다 통증이 덜하다고 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하여 아이퍼트 박사는 “현재 연구진은 여러 종류의 약에 대하여 플라시보 효과를 비교하고 있으며, 플라시보로 실제 약의 효과를 높여주는 방법도 찾고 있다”고 전하며 “특히 정신의학과 신경의학의 분야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플라시보 효과에 숨어있는 치료 기능을 발견하기 위하여 연구를 계속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노시보 효과도 플라시보 효과처럼 과학적 근거 있어
심리적 현상이 치료 효과를 높이는 데 활용되는 경우가 있다면, 반대로 치료를 더디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바로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다. ‘nocebo’는 ‘상처를 입을 것이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로서, 플라시보 효과와는 정반대가 되는 개념이다.
아무리 좋은 약을 먹더라도 의사가 약에 대한 정보를 잘못 전달했거나, 또는 환자가 오해를 하여 약의 효능을 불신하게 되면 원래의 기대치에 비해 70% 밖에는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바로 이런 경우가 노시보 효과라는 것이다.
노시보 효과도 플라시보 효과처럼 과학적 근거가 임상 실험으로 확인된 바 있다. 영국 헐대의 심리학과 교수인 어빙 커시(Irving Kirsch)는 “과거 수 세기 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이 단 시간에 집단적으로 퍼졌던 현상, 즉 ‘집단 심인성 질환(mass psychogenic illness)’이라고 알려진 현상도 노시보 효과의 일종”이라고 설명했다.
커시 교수는 우선 지난 1998년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생된 사건을 예로 들었다. 한 교사가 휘발유 비슷한 냄새를 맡고서 두통과 현기증을 호소했는데, 그 뒤를 따라 학생 100여명이 비슷한 증상으로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하지만 질환의 원인을 밝혀낼 수 없었다. 다만 그들 모두가 교사가 고통 받는 장면을 목격한 학생들과 그런 학생들을 옆에서 지켜본 또 다른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만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었다.
이와 더불어 실내 벽면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한 여자가 공기를 마시고는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계속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스크린 속 여자처럼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집단 심인성 질환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어빙 교수는 “노시보 효과도 플라시보 효과처럼 모두 사람의 마음가짐과 태도, 그리고 감정 등의 상태가 치료에 얼마만큼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실증적인 근거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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