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목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중에 나오는 돌길.
배고픔을 감당하지 못해 점심도시락을 홀라당 까먹은 건 아침 7시였다. ‘유명산악회’와 함께 지리산 종주를 시작한 지 4시간 만이었다. 차가운 맨밥이 그토록 꿀맛일 수 없었다. 달걀프라이를 한입에 털어 넣는 동안 ‘달걀 살충제 논란’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백종천(53) 인솔대장이 말했다. “체하겠어요. 천천히 드세요.”
성삼재에서 세석으로 가기까지 몇 차례 고비가 있었으나, 이젠 정말 한 발짝도 못 떼겠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건 벽소령 산장에 도착한 오후 3시였다. 이미 12시간이 넘도록 산을 탄 뒤였다. 이대로 가다간 쓰러질 게 분명했다. ‘1박3일은 애당초 무리였어! 굳이 산악회를 따라갈 필요는 없잖아! 2박3일로 바꾸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즉시 산장 창구에 고개를 들이밀고 직원에게 숙박을 문의했다. “아뇨, 당일예약은 안 됩니다.” 무관용 원칙주의자임이 틀림없는 그의 눈빛이 얼마나 단호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이젠 어째? 혼미해지는 영혼을 붙들었다. 좋든 싫든 백 대장이 “과장 좀 보태 관악산 3개꼴”이라던 구간을 지나야 했다. 암벽등반 뺨치는 코스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밧줄을 붙잡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는 바위가 많았다. 글쎄, 한 스물여덟 군데쯤 되려나? 세다가 그만뒀다. 떼라도 좀 써볼걸. 아픈 척이라도 해볼걸. 차라리 발목을 삐끗해 버릴까?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갈 수 있을 텐데. 아, 부질없고 미련한 공상이다.
지리산 일출을 바라보는 강나연 객원기자.
천왕봉 정상에 오른 강나연 객원기자.
몸의 감각이 되살아났기 때문일까, 거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장딴지는 비록 납덩어리 같았지만 이튿날은 희한하게 수월했다. 빵이며 초코바며 육포까지 그야말로 먹는 대로 쫙쫙 흡수가 됐다. 탄수화물의 중요성을 절감하며 전날보다 능숙하게 산을 타고 여유롭게 둘러봤다.
거대한 산이 줬던 두려움은 어느새 기쁨이 되어 돌아왔다.
◎ 지리산 종주 시 준비물: 속건성·투습도 높은 의류, 7부나 긴 바지, 모자, 고글이나 선글라스, 선크림, 두꺼운 양말, 충격 흡수가 잘되는 등산화, 스틱 및 무릎보호대, 여벌 옷, 우비, 헤드랜턴(예비전지 필수), 취사도구(버너, 코펠, 칼, 수저, 가스), 라면이나 쌀, 초콜릿이나 육포, 사탕처럼 열량이 높은 간식, 탈수 방지 및 양치용 소금, 비상약품, 물파스, 생수통(평균 2시간 단위로 샘터에서 보충할 수 있음), 카메라, 칫솔과 클렌징 티슈 정도의 간단한 세면도구(치약, 비누, 샴푸 사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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