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원의 시시콜콜 과학사] 무궁화 이야기

[서효원의 시시콜콜 과학사] 무궁화 이야기

입력 : 2017.07.29 10:52:47

서효원 농촌진흥청 화훼과장

요즘 우리나라 같이 무덥고 습한 기후의 온대지방에서 꽃이 피는 나무는 매우 드물다. 기껏 배롱나무(목백일홍)나 남쪽지방에 많이 심는 작은 꽃이 많이 피는 꽃댕강나무, 가로변에 어색하게 심겨있는 수입산 수국 정도가 눈에 띨 뿐이다. 그러나 이맘때부터 초가을까지 전국 어디에서나 꽃을 볼 수 있는 우리나라 나무가 있다. 요즘 꽃이 피는 연꽃, 달맞이꽃, 부처꽃처럼 습한 환경을 좋아하는 풀꽃들과는 달리 습한 기후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도 무궁화는 무덥고 습한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계속해서 꽃이 피고 진다. 말 그대로 무궁화다.

무궁화의 꽃 색깔은 순백색(純白色)과 그 이외의 꽃으로 나눌 수 있고, 순백색 이외의 무궁화는 전부 꽃의 중앙부에 붉은색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단심(丹心)이라 부르는데 꽃잎의 색깔이 흰색 바탕일 경우 백단심(白丹心), 분홍과 붉은색 바탕일 경우 홍단심(紅丹心), 자색이나 청색 바탕인 것을 청단심(靑丹心)이라 부른다.

▲꽃잎의 색에 따른 무궁화의 분류. 좌상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배달계, 백단심계, 자담심계, 홍단심계, 청단심계, 아사달계 순.

◆ 다양한 이름

무궁화는 여러 문헌에 매우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침에 피어 저녁에 진다고하여 조균(朝菌), 조화, 조생(朝生), 조개모락화(朝開暮落花), 조생모락화, 조생석사(夕死) , 조생석운(夕隕) 등으로 별칭하기도 했고, 꽃이 순식간에 진다고 하여 순(舜), 순화, 순영(舜英), 일급(日及), 일화(日華) 등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었다 하여 번리초(藩籬草), 줄기를 거꾸로 심어도 잘 산다고 하여 이생(易生), 잠을 자지 않고 꽃이 핀다하여 무숙화(無宿化)라 부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별칭이 있는데 대부분 시와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보편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중국의 문헌이나 문학작품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무궁화(無窮花)'는 중국문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는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무궁화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기록은 고려 중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다. 꽃이 끝없이 피고 지는 특성 때문에 '무궁(無窮)'이라고 했다는 주장과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기쁘게 할 목적으로 궁궐에 많은 꽃들을 심게 했으나 유독 왕의 명을 거역하고 궁궐 밖에서만 꽃을 피웠다는 전설에서 '무궁(無宮)'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등장인물들의 논쟁의 기록이 재미있다.

조선 후기까지 우리나라 문헌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다른 이름은 단연 '목근(木槿)'인데 '산림경제(山林經濟)', '본초강목(本草綱目)', '화암수록((花庵隨錄)',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동의보감(東醫寶鑑)' 등에도 대부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무궁화는 목근(木槿)>무근>무궁으로 음이 바뀌어져 부르게 된 것이라는데 타당해 보인다. 실제 목화솜으로 짠 '무명'이 '목면(木綿)'의 발음이 그리 바뀌었다고 보는 것과 같은 근거다. 조선후기부터는 대다수의 국내문헌에는 무궁화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 그러나 그려지지 않은 무궁화

이처럼 다양한 기록과 문학작품에서는 많은 별칭으로 불렸던 무궁화지만 특이하게도 그림으로 그려 남겨진 것은 거의 없다. 근세 조선시대까지 남겨진 그림 중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무궁화 그림은 조선말기 도화서의 화원 유숙(劉淑, 1827-1873)이 민화풍으로 그린 작품 '장원홍(壯元紅)'이다. 또한, 1912년 로렌스 크레인 여사가 선교사인 남편을 따라 순천 주변과 전국에 자생하는 꽃들을 그려 1931년 일본에서 출판한 '한국의 꽃 민간전래 이야기(Flowers and Folklore from far Korea)'에는 청단심계의 무궁화가 잘 묘사되어 있다. 우리나라 자생 무궁화를 원래 모습대로 그린 유일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조선후기까지의 회화 작품 중 거의 유일하게 남겨진 무궁화 그림인 유숙(1827-1873)의 작품 '장원홍(壯元紅)

▲무궁화(로렌스 크레인, 1931)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자랐던 무궁화가 이처럼 그림 작품에서는 홀대받았던 이유는 아마도 사군자 중심의 회화문화에서 기인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장원홍'은 중국 진나라에서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이 장성해 과거에 급제할 경우 꺼내 마시기 위해 담가 땅에 묻어 둔 술이 아니던가?.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어사화로도 이용했던 무궁화가 문인화나 민화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일제 강점기인 1910년 배화학당과 상동청년학원의 교사로 재직하던 남궁억 선생이 건강악화로 낙향해 1919년 강원도 홍천군 서면에 모곡학교를 설립하고 전국적인 무궁화 심기운동을 펼치다가 1933년 구속되어 1935년도 지병으로 사망한 사건이 있다. 무궁화에 깃든 정신과 의미를 생각한다면 일제가 무궁화에 대한 기록과 상징물을 말살하려 노력했을 수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 나라꽃으로 된 사연

무궁화를 우리나라의 국화(國花)로 지정한 법적인 근거는 없다. 193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조선의 국화 무궁화의 내력'이라는 기사에서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어오게 되고, 서양인의 출입이 빈번해지자 당시의 선각자 윤치호 등의 발의로 양악대를 비롯해 애국가를 창작할 때 애국가의 뒤풀이(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이 들어가면서 무궁화는 조선의 국화가 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우리나라 전국에 많이 피는 무궁화가 자연스럽게 애국가 가사에 포함되어 우리나라를 상징하게 되었다는 것은 잘되고 타당해 보인다. '끝없이 피고 지는 꽃'임을 의미하는 무궁화는 한 개의 꽃의 피고 지는 기간은 하루나 이틀로 짧지만 매일 새로운 꽃이 연이어 피고 지기를 반복하여 3개월 정도 계속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인 신부 리처드 러트(1925~2011)가 20년 넘게 한국에서 신부로 있으면서 쓴 '풍류한국(1965, 신태양사)'에서 프랑스, 영국, 중국 등 세계의 모든 나라꽃이 그들의 황실이나 귀족을 상징하던 꽃이 국화로 지정되어 있지만 한국의 무궁화는 거의 유일하게 황실을 상징하던 이화(李花, 자두꽃)가 아닌 평민의 꽃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진 것이 인상 깊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민주적 전통이 배어 있는 꽃이라는 그의 표현이 맘에 들어온다. 간혹 무궁화에 대한 근거없는 원산지 논란이나 잘못 파악한 분포지역을 근거로 나라꽃으로서의 상징성에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궁화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은 우리의 국민성인 은근과 끈기를 잘 표현하고 있고, 오무려진 무수한 꽃이 뚝뚝떨어져 있는 습한 땅에서 여전히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은 우리나라가 겪어 온 역사와 너무 닮아 있다. 왠지 애틋한 느낌의 꽃이기도 하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효원 박사는 건국대 식물학 박사로 네덜란드 와게닝겐UR 국제식물연구소 방문연구원과 북극다산과학기지 하계연구단 고등식물연구책임자로 역임한 바 있습니다. 건국대, 강원대, 강릉대 강사를 지내고 현재 농촌진흥청 화훼과장으로 한국원예학회, 한국식물생명공학회, 도시농업연구회 이사를 겸임하고 있습니다. 한국식물학회, 한국육종학회 정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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