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눈을 뜨면 학교에 가고, 달 뜨는 밤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며, 자율학습을 마치고는 학원에 간다. 우리나라 고등학생 대부분의 일과다. 하지만 가끔은 되풀이되는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한 가지 주제를 골라 색다른 여행을 가보는 것도 좋겠다.
박경리 문학공원부터 이효석 문학관까지. 학교에서 배운 문학의 현장을 찾아가는 여행은 감회가 새로웠다. 이 땅을 껴안고 살았던 조상들의 삶을 더듬어 보고, 바람직한 삶의 자세를 찾아보는 시간이었다. 학업에 지친 청소년들의 심신을 위로하고 풍부한 감성과 인성을 함양해준 문학기행. 이 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한다.
비극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 박경리
언젠가 가족과 함께 토지의 배경인 경남 하동의 최 참판 댁을 여행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문학에 대한 관심과 『토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박경리 문학공원은 『토지』의 내용과 의의를 알고 나서 간 것이었기에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많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처럼 크게 와 닿은 것은 처음이었다.
박경리 문학공원에는 박경리 선생의 생애와 소설 『토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은 ‘박경리문학의집’이 있다. 이곳 2층에는 박경리 선생이 직접 조각한 여인상, 직접 만든 옷, 농사지을 때 쓰던 호미와 장갑 등이 전시돼 있어 선생의 생애를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전시실 3층은 소설 『토지』를 위한 공간이다. 소설의 등장인물 관계도를 크게 그려놓고, 내용 중 중요한 구절을 크게 표현하고 당시 시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소품을 적절하게 배치해 놓아 관람객들이 소설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또 5층 세미나실에서는 박경리 선생이 지나온 삶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영상을 통해 박경리 선생의 본명이 ‘박금이’라는 사실과 박경리라는 필명을 소설 『역마』의 김동리 작가가 지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경리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예술가가 소속되기를 원한다면 절대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없다.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어디 소속될 때는 자기의 창조능력도 저당을 잡히는 것이다. 절대 자유 속에서만 창조할 수 있다. 모든 일반 사회인들은 ‘자유로워지고 싶다’라고 하는데, 사실 자유라는 것은 가시밭길과 같다. 외로워야 자유로운 것이다. (중략) 외부에서 차단할 수도 있지만, 작가가 진정한 자유를 원할 때는 스스로가 차단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내가 26년 『토지』를 쓴 세월은 나 스스로가 차단한 시간이다. 그 싸움이 글 쓰는 이상의 싸움이었다.” 그저 ‘자유롭다’라는 말을 일차원적으로 생각했던 나는 그 말이 담고 있는 속뜻을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문학의집 옆으로는 박경리 선생이 18년 동안 지내면서 소설 『토지』를 집필한 ‘옛집’이 보존돼 있다. 옛집 마당에는 선생이 텃밭에서 일하고 난 후 즐겨 앉던 바위에 고양이와 더불어 호미와 책을 옆에 두고 쉬는 모습을 재현한 조각상이 있다. 집 바로 앞에는 작은 못이 있는데 이 못은 박경리 선생이 사랑하는 손자를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손주를 위해 집 앞에 손수 연못까지 팠다는 얘기를 들으니 문학을 넘어 가정적으로도 대단한 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자를 위해 박경리 선생이 직접 판 못.
박경리 선생의 집필실.
“글을 잘 쓰려면 소설 『토지』를 꼭 한 번 읽어봐야 한다. 국문으로 나타낼 수 있는 모든 표현이 존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인 있다. 기자단 활동으로 글을 쓸 일이 많은 요즘 이 말을 몇 번이고 떠올린다. 더 좋은 글 그리고 더 좋은 나의 문학 세계를 위해 한 번은 읽어 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농촌 문학의 거장, 김유정
2010년까지 사용된 김유정역의 전경.
소설 동백꽃의 한 장면을 묘사한 조형물.
소설 봄봄의 한 장면을 묘사한 조형물.
김유정 작가의 고향 마을인 실레는 금병산에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움푹한 떡시루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마을 전체가 김유정 작품의 무대로, ‘점순이’ 등 소설 12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유정역 근처에서 볼 수 있는 팻말.
김유정의 삶과 문학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동백꽃’이 아닐까 싶다. 1930년대 삶의 아픔을 김유정만의 독특한 향기로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동백꽃’ 향기가 실레마을 가득 퍼져갈 때쯤 다시 한 번 찾아가보고 싶다.
레일 바이크를 타는 학생과 선생님.
레일 바이크에서 본 북한강 풍경.
첫째날 일정을 모두 마치고 숙소에 돌아가서 본 강원도 인제의 밤하늘은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이 절로 떠오르게 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별들은 이효석 작가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묘사된 메밀밭의 풍경과도 흡사하였다. 이런 곳에서 펜 끝이 움직이지 않는 것도 죄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국 현대 단편문학의 대표 작가, 이효석
다음날 찾은 마지막 방문 장소는 평창에 있는 이효석 문학관이었다. 이효석 문학관은 가산 이효석 선생의 연보와 삶의 세세한 부분들, 가산의 문학 세계 및 문학 지도, 봉평 장터를 재현한 모습 등을 전시하고 있다. 넓은 동산 위에 문학관 본관과 카페, 포토존, 이효석 문학비, 그리고 ‘메밀꽃 필 무렵’의 한 장면을 표현한 물레방앗간이 위치하고 있다. 물레방앗간에서는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의 하룻밤 인연을 엿볼 수 있다.
이효석 작가는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하다. 이 소설은 만남과 헤어짐, 그리움, 떠돌이의 애수 등이 아름다운 자연과 융화되어 미학적인 세계로 승화된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전시관에 재현해놓은 그의 작업실은 토속적이고 서정적인 작품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느낌이었다. 벽면에 ‘Merry X-mas!’라고 영문으로 쓴 장식판과 프랑스 여배우의 사진이 걸려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작가가 서구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걸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효석 작가의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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