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집: 입맛이 자리 잡는 곳
비 오는 날은 점심식사 시간에 서둘러 나서야 한다. 날씨 탓에 직원들의 입맛이 국수집으로 향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인근 다른 직장인들도 그럴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자칫 늑장을 부리다가는 그 몇 배의 시간을 국수집 문 앞에서 대기해야 하거나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
무더운 날도 마찬가지다. 냉면집은 물론이고 매콤짭짤한 양념 셔벗(sherbet)이 덮인 물회에 말아 먹는 소면은 금세 배 속을 냉장고로 만들어버리기에 한낮의 근로자 입맛을 유혹하기 때문이다. 신 김치를 송송 썰어 넣고 도토리묵을 길게 칼질해 육수에 띄우고는 한가운데에 누룽지처럼 구수한 메밀국수를 똬리 틀어놓은 막국수는 또 어떤가. 민통선 장단 콩을 곱게 갈아 냉장시킨 걸쭉한 콩 국물로 그릇의 절반을 채워 칼국수 면을 백사장으로 만든 콩국수는 고소한 영양식이니 두 말할 필요 없다.
동북아시아인들만큼 국수를 좋아하는 인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민족을 비롯한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은 면(麵)을 좋아한다. 물론 국수의 대표적인 재료인 밀은 중국을 통해 들어와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 그 역사의 원천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기원전 7000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재배되던 야생종 밀이 기원전 1~2세기경에 서아시아로 연결된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제사상에 올렸으니 면은 그만큼 귀한 음식이었다. 조리가 어려운 게 아니라 밀이라는 곡물이 귀했기에 당시의 국수는 제례나 귀족들의 잔칫날에나 내놓는 음식이었던 거다. 그런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국수는 소박한 결혼식에서 하객에게 내놓는 한 끼니다. 그릇 중앙에 한 덩이 소면 상투를 내려놓고 짭조름하고 따끈한 멸치국물을 부은 다음, 가늘게 채 썰어 볶은 호박과 당근, 유부 서너 개와 계란채 두세 줄, 마지막으로 어긋어긋 썬 대파 한 숟가락과 마른 김 부스러기를 조금 집어 얹으면 완성되는 잔치국수가 그것이다. 수십 인분을 준비해야 하는 국수로는 잔치국수야말로 가장 손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국어사전에는 한글로만 표기된 ‘국수’의 한자어는 掬水인데, 이는 끓는 물에 삶은 면을 찬물에 헹궈 건져 올리는 방식에서 지어진 이름이라니, 국수는 헹굼 과정이 없는 칼국수보다는 잔치국수, 비빔국수, 콩국수, 냉면, 막국수처럼 면을 삶은 후에 육수나 양념장을 첨가하는 게 본래의 방식이다.
이처럼 입맛을 일깨우고 마음에 자리 잡는 국수집은 낯선 길가에 있다. 5년 전 가을, 내가 거주하는 도시 변두리의 시골 동네를 지날 때였다. 50미터쯤 거리에 허름한 가옥이 있었고 그 집 앞에 어린아이 키만 한 입간판이 서 있었다. 그곳에 붉은색 손글씨로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국수. 저녁식사를 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지인과 나는 그 집 앞으로 걸어갔다. 작은 유리창을 통해 안쪽을 기웃거린 내가 말했다. “이 집, 뭔가 있어. 포스(force)가 느껴져. 들어가 봅시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껏 먹어본 최고의 잔치국수였다. 가격은 3000원. 호박과 당근만 조금 넣고 부친 막전도 한 장에 3000원. 상주 막걸리 한 주전자도 3000 원. 그날 우리는 1만 2000원으로 국수와 술과 안주를 배불리 먹었다. 배추김치는 너무 맛있어서 그것만 놓고도 막걸리 한 주전자는 더 비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날 이후 그 국수집은 택시를 타고서라도 종종 찾아가는 나의 단골집이 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소박한 깊은 맛과 세월을 품은 분위기와 호주머니의 만족감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국수집의 포스는, 다소 투박하지만 경솔하지 않은 주인장 부부의 정직성에서 나온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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