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려군' 그의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첨밀밀’, ‘월량대표아적심’

가수 등려군(1953~1995)


1979년 발매된 등려군의 <첨밀밀> 음반 표지

영화 <첨밀밀>을 다시 봤다. 등려군(덩리쥔)을 생각하면 머릿속에 장만옥(장만위) 얼굴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에 어쩐지 봐야 할 것 같았다. ‘아시아의 가희’라 일컫지만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이 영화를 통해서였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외모로만 치자면, 사실 등려군의 젊은 시절 모습은 오히려 배우 탕웨이와 더 닮아 보이긴 한다. 2012년에 이안 감독이 제작을 알렸던 등려군 전기영화에 실제로 탕웨이가 캐스팅되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등려군을 떠올리면 ‘톈미미~’ 하는 멜로디와 홍콩 시내를 자전거를 타고 누비는 장만옥, 여명(리밍)의 모습이 떠오른다. 섣달그믐날, 갖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 등려군 음반 장사에 나섰던 이요(장만옥)와 소군(여명)이 쫄딱 망하고 숙소로 돌아와 마침내 눈이 맞는 장면이 있다. 두 사람이 어깨도 나란히 하지 못할 만큼 좁고 궁상맞은 방에서 떡국을 끓여 먹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폭풍 키스’를 하는 장면이다. 다소 불가해한 포인트지만 떡국에 눈길이 갔다. 말하자면 ‘소울푸드’를 나눠 먹고 몸과 마음을 나누는 그 순간, 등려군과 성룡(청룽)의 연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등려군은 ‘첨밀밀’, ‘월량대표아적심’ 등 달콤한 사랑노래로 유명해졌지만 정작 그의 연애는 꽤나 험난했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드라마 주제곡을 불러 유명해진 그는 이미 십대 때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활동했고 20살 때부터는 일본 활동도 시작했다. 성룡과의 교제가 시작된 건 1979년 미국에서였다. 다정하고 착한 성정을 지녔던 등려군은 당시 무명배우로 할리우드에서 촬영중이던 그를 챙겼다. 집으로 초대해 고향에서 즐겨 먹던 녹두탕을 대접했던 것. 둘이 꽤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한동안 데이트를 이어갔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등려군은 이미 대스타였고, 성룡은 그가 훗날 자서전에서 고백했듯이 열등감에 차 있었다. 객지살이의 위안이 되었던 관계는 대만으로 돌아와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등려군 쪽은 후에 ‘친밀한 친구’였을 뿐이라고 선을 그었으니 그리 심각한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등려군에게 상처로 남았으리라 추측되는 관계는 이듬해 만난 말레이시아 ‘설탕왕’ 2세와의 파혼이다. 결혼 조건으로 노래를 포기하라는 상대 집안의 요구를 거절하고 ‘가수 등려군의 길’을 택했다. “스물아홉살 때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다만 제겐 노래밖에 없었습니다.” 파혼 뒤, 그는 1985년 중국어로 발매한 곡 ‘상환’(償還)을 부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90년대 들어서는 몹쓸 루머에 시달렸다. ‘낮에는 등소평을 듣고, 밤에는 등려군을 듣는다’고 할 정도로 양안관계 해빙의 상징이었던 그는 1989년 천안문(톈안먼) 사태를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는다. 불면증 등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가수 생활을 전부 내려놓고 파리로 이주한다.

1990년과 1991년 두 차례나 등려군이 사망했다는 유언비어가 돌았다. 그러다 결국 1995년, 42살의 나이로 타이 치앙마이에서 요절했다. 갑작스러운 ‘천식 발작’이었다. 다행히 ‘사랑’ 안에서 잠들었다. 당시 그의 곁에는 열다섯살 연하의 프랑스인 연인이 있었다.



공지 있습니다.
개인사정으로 본 사이트는 더이상 업데이트 되지 않습니다.하지만 아래 사이트에서 꾸준히 업데이트 되고 있으니 참고 하세요.

최신 기사는 '정리해 주는 남자' 에서 고화질 사진은 'HD 갤러리' 에서 서비스 되고 있습니다.

md.sj

사건사고 오늘의이슈 주요뉴스 연예정보 상품리뷰 여행 푸드 알쓸신잡 자동차 과학이야기 HD,UHD사진 고화질바탕화면 음악소개 소프트웨어

    이미지 맵

    이전 글

    다음 글

    Reviews & Information/공연.문화.영화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