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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과 조현병

md.sj 2017. 9. 24. 16:17


[정신의학신문 : 신동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예술가 중에는 비운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반기지 않는 출생으로 삶을 시작하여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삶을 마감했던 비운의 천재 조각가인 카미유 클로델(1864. 12. 8 - 1943. 10. 19)을 소개하고자 한다.

카미유는 1864년 프랑스의 페르-앙-다드누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던 순간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상당한 지위가 있는 공무원이었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카미유가 환영받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녀가 태어나기 일 년 전에 세상에 태어났다가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난 장남 샤를 앙리 클로델 때문이었다. 아들을 잃은 카미유의 부모는 크게 상심하였고, 다시 아이를 가져서 15개월 만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딸인 카미유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실망감에 거리를 배회했고, 어머니는 그녀의 존재조차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훗날 아버지는 딸의 미술적 재능을 반기고 격려했던 반면 어머니는 그녀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부인하며 나중에 태어난 아들(폴 클로델: 프랑스의 시인, 작가, 외교관으로 유명하다)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그녀는 부모로부터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도 못한 채 초기 유아기를 보내고야 말았다. 에릭슨에 의하면 출생 후 일 년 동안의 기간에 보살핌을 잘 받지 못하면 세상을 불신하게 된다고 하며 이런 사람은 훗날 조현병이나 편집형 인격장애에 걸릴 수 있다고 한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카미유는 혼자서 흙을 만지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점토에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카미유는 12살에 <다비드>, <골리앗> 제작하여 천재성을 보이더니 19살에 로댕의 눈에 띄게 되고 20살에는 로댕의 아틀리에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40대 중반이던 로댕은 이미 파리에서 조각의 태두로 자리를 메기고 있었다. 조각사에 있어 로댕의 업적이라고 한다면 아름다움과 틀에 박힌 규칙만을 중요시 여기던 전통적인 조각을 벗어나 사실적인 표현으로 아름답지 않은 것도 예술로 끌어올리고 매끄러운 피부 대신 울퉁불퉁한 굴곡을 많이 넣어 조각을 비쳐주는 빛의 효과도 중요하게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런 로댕의 영향을 받아 카미유는 사실적이면서 삶의 무게가 그대로 실린 작품들을 제작하게 되었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였을까. 카미유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로댕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로댕에게는 결혼을 하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살았던 ‘로즈 뵈레’라는 조강지처가 있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계속 발전해갔다. 그녀는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며, 예술의 동지이자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로댕은 그녀의 천재성을 인정하여 제자들에게 점토작업만 맡긴다는 규칙을 깨고 그녀에겐 작품의 일부를 만들도록 했으며 당시 여성 예술가를 무시하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카미유는 조각계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십여 년 만에 끝이 나고야 말았다. 로댕의 사랑은 예전과 달리 식어갔고, 계속되는 카미유의 성공은 그의 예술적 지위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로댕과 카미유는 예술적인 이유를 들어 결별하였고 로댕은 로즈에게로 가버렸다. 로댕과의 결별 후 그녀는 로댕과 비평가와 싸워야 했고, 그 과정에서 그녀는 점점 예술계에서 멀어졌고, 그녀의 작품은 로댕의 아류라는 평을 받은 채 잊히게 되었다. 그녀는 점차 세상을 멀리하게 되었으며 아틀리에에서 12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칩거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로댕과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미행하며 자신에게 해를 입힌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녀는 에릭슨의 주장대로 조현병에 걸리고 말았다.

조현병이란 사고, 지각, 정동, 행동, 사회활동 등 다양한 정신기능의 이상을 초래하는 정신병으로 젊어서 발병하며 만성의 경과를 밟고 인격의 황폐화를 초래하는 병이며 흔한 증상으로는 환각과 망상이 있다. 40살 경 조현병에 걸린 후 그녀는 예술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창조성이 말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낸시 안드레아슨(Nancy Andreasen)은 “양극성 장애가 창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반면 조현병은 창조성을 말살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녀의 주장은 상당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모든 조현병 환자가 창조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조현병 환자가 그린 그림은 장식적이고 기하학적인 요소가 많고, 상징이 자주 등장하며 경계나 윤곽을 무시하기도 하고 두상의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그리는 등의 특징이 종종 관찰되는데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서 그들의 그림이 더욱 예술적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현병에 걸린 후 그녀의 삶은 비참하게 변했다. 그녀는 세상이 두려워 은둔하며 살았다.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여겼지만 어머니와 남동생은 그녀를 부끄러워했다. 결국 191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녀는 어머니와 남동생에 의해 빌레-브라르 정신병원으로 보내졌고, 1914년 아비뇽의 몽트베트게 병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이후 30년 동안이나 수용되었다. 당시의 정신병원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제대로 된 치료약도 없었고, 인권이 유린되어 묶이거나 감금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카미유는 남동생에게 지속적으로 퇴원을 요구했다. 그녀가 보낸 서신에는 “네 누나가 감옥에 갇혀 있음을 잊지 마라. 감옥에 있는 미친 사람들은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고 얼굴을 찌푸리고 세 마디 말 이외에는 말로 표현할 능력도 없단다”라고 썼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와 남동생은 그녀의 퇴원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가족과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1943년 사망하게 되었다.

오늘날이었다면 카미유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날엔 치료약과 치료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치료를 받아서 일상으로 돌아가서 예술활동을 계속 했을 것이고 또 설령 사회 적응이 어려워서 정신병원에서 오랜 기간을 보낸다 해도 인권이 유린되지 않고 상당한 자유를 누리며 예술성과 창조성이 발휘되도록 도움을 받아서 지냈을 것이다. 또 오늘날이라면 남자가 아니어서 예술가로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수모를 겪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천재 조각가가 다시 등장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