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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 이야기] 눈으로 먼저 즐기고 혀로 느끼는 '법성포 굴비' 한정식

md.sj 2017. 9. 21. 18:30

[법성포 '다랑가지 식당']

내장 먹을 만해야 진짜 굴비
그 맛에 과식이 걱정된다면 처음부터 눈길도 주지 말아야
"노릇노릇 구워내면 맛난 반찬" 옛 조상의 詩 절로 떠올라

예나 지금이나 조기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생선 중의 하나다. 태조실록에 '새로 난 석수어(石首魚)를 종묘에 천신(薦新)하였다'(1397년 4월 1일)란 기록이 있을 정도로 조기는 예로부터 최상의 대접을 받았다. 조기를 염장 건조하면 더욱 맛 좋은 굴비가 되고 보관성도 좋으므로 선물이나 접대용으로 많이 사용했다. 고려 말 문신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집 '목은시고'를 살펴보면 '자복(子復)이 법주(法酒)와 말린 석수어를 대접해 준 데 대해 사례하다'라는 제목의 시가 눈에 띈다.

"잔 비늘의 물고기 석수어라 하는데, 맛난 술은 춘심을 채워 주네/ 거품 뜬 술은 향기가 막 풍기고, 말린 고기는 맛이 절로 깊구나(細鱗名石首 美酒實春心 浮蟻香初動 乾魚味自深)."

자복(子復)은 민안인(閔安仁)의 자(字)로 목은이 지어준 것이다. 목은이 15세 연하의 민안인이 벼슬길에 나오자 특별히 붙여준 것을 보면 둘의 관계는 좀 특별했던 것 같다. 민안인 입장에서 보면 벼슬길에 나오면서 당시의 실력자에게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자복은 굴비와 미역 등을 선물로 보내고 음식 접대를 하면서 오래도록 관계를 유지한 셈이 되는데, 요즘 같으면 목은이 대접을 받고도 결코 시를 남길 리가 없다. 관료끼리의 명품 술과 굴비 접대는 필시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위반에 걸렸을 테니까.

조기는 봄철부터 초여름까지 연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산란했다. 이 때문에 추자도, 전남 영광 칠산 앞바다를 거쳐 연평도를 지나 평안도 해안 지역에까지 조기잡이가 이루어졌고, 조기 떼를 쫓아 모여든 전국의 수많은 어선은 몇몇 항구에서 파시(波市)를 이루었다. 특히 영광의 법성포는 그 대표적인 파시 지역이었다. 19세기에도 얼마나 배가 많았으면, 이유원은 '임하필기'에서 조기철이 되면 법성포 칠산 앞바다에 "배들이 바다 위에 늘어서는데, 영락없이 파리 떼가 벽에 달라붙은 것과 같아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까지 했다. 197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던 연평도나 법성포의 조기잡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요즘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명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굴비 가공 노하우는 법성포를 따라올 데가 없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가을 초입, 법성포로 차를 몰았다. 법성포에 들어서자 온통 굴비 간판이 붙은 음식점 천지다.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영광 관아 북쪽 20리 지점에 '파시전(波市田)'이 있고, "매년 봄 온 나라의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판매하는데, 서울의 저잣거리처럼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고 되어 있다. 그 파시전 자리가 지금의 법성포 어디쯤일 것이고, 현재의 음식점이나 상점가로 변했을 것이다.

법성포가 고향인 지리산에 사는 P 시인의 소개로 찾아간 집은 다랑가지 식당(대표:나호일·허영숙). 요즘 굴비의 대세는 중국산 양식 부세조기를 국내서 가공한 이른바 '부세굴비'다. 국내 참조기 생산량이 적고 굴비 수요가 많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한편으로 같은 가격이면 더 크고 두툼한 굴비를 먹을 수 있으니 부세굴비를 더 선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랑가지 식당은 국산 참조기를 제주 한림항에서 경매 받아 섶간 방식으로 간을 하고 건조 후 냉동 보관했다가 손님상에 낸다고 한다. 섶간이란 물간에 대척되는 말로 생선에 소금을 직접 뿌린다는 의미다.

이윽고 법성포 전통의 정갈한 굴비 한정식이 차려져 나온다. 한정식이란 우선 눈이 즐거워야 하는 법. 쪄서 나온 굴비, 구운 굴비, 간장 게장, 통으로 튀긴 갈치, 통보리 백김치, 갈치속젓 등의 조화가 찬란하다. 먼저 굴비를 반으로 갈라, 드러난 내장을 먹는다. 고소하고 비리지 않다. 진짜 굴비는 먼저 내장이 먹을 만해야 한다. 하얀 쌀밥 한 숟가락 위에 굴비 살점을 두툼하게 얹어 입으로 가져간다. 목젖에서 꿀꺽 소리가 난다. 굴비 살 자체가 신선하고 간은 심심하다. 찐 굴비, 구운 굴비, 간장 게장 등으로 밥을 비워 나간다. 조기 액젓으로 간을 한 김치는 남도의 맛이 온통 녹아 있다. 과식을 걱정하려면 법성포 한정식은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게 조금은 게걸스럽게 약간은 우아하게 상을 다 비운다.

"비릿한 바람이 바다에 불어오면/ 노란 배 조기가 어선에 가득하다네. 노릇노릇 구워내면 맛난 반찬이 되고/ 진하게 탕으로 끓이면 맛이 좋다네. 모습은 아름답지 못하지만/ 고기는 두루두루 쓰인다네. 좋아라, 바짝 말린 후에/ 밥 먹을 때 가장 먼저 올린다네"(한시 번역은 이종묵)라고 노래한 조선 중기 시인 이응희의 시 '조기(石首魚)'는 세월이 지나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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